때로는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공간에 의해 지배를 받는 듯한

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. 이를테면 샤워할 때가 나한테는

그런 행위와 공간입니다. 언젠가부터 내가 “이건 샤워하다가

생각난 건데” 라는 말을 종종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.

실제로 샤워를 하다 보면 별 게 다 떠오릅니다. 술김에 누락되었던

기억부터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했던

고유명사, 깜빡 잊고 지나칠 뻔했던 사소한 약속까지.

샤워는 단지 몸에 묻어 있는 노폐물을 씻어내는 이상의 기능을

하고 있습니다. 가장 좋은 건 풀리지 않는 생각의 실마리나 기발한

생각이 불쑥 튀어나오는 경우입니다. 하지만 그렇게 떠오른 생각의

대부분은 기억되지 않고 증발해 버린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.

샤워의 새로운 기능을 알게 된 나는 어떻게 하면 샤워하면서

메모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습니다. 번개처럼 순식간에

스치는 생각을 잡기 위해 종이와 필기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.

재미있는 건 이렇게 생각을 잡기 위해 모든 준비를 갖춰 놓자

샤워의 기능은 그저 몸을 씻는 것으로 끝나버렸다는 사실입니다.

이런 준비가 욕심처럼 여겨진 것인지 영감은 물론 아무것도 떠오르지

않았습니다. 마치 이 시간마저 자기계발이나 자기 치유의 방편으로

활용하려는 건 순수하지 않다고 꾸지람하듯이…

그래서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. 아무 생각 없이,

멍하니 ‘샤워만’ 하는 것입니다. 진짜 오롯이 나를 그 행위에 위탁하는

마음으로. 그러다 보면 욕실을 뛰어나와 뭔가를 급히 적는 상황이

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. 1386 ^^*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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